[Book] 우리들의 하느님

Review
작성자
在耳
작성일
2024-06-23 01:52
조회
226
몇 해 전 마음이 한없이 사막을 헤매던 시절, 동화 속으로 천착하던 시간들이 있었다. 신학의 거대한 담론이나 성경의 엄중한 글자 속, 그 어디에도 맘붙이지 못하고 표류하던 시절이었다. “괴물들이 사는 나라” 에서 “괜찮아” 라는 위로를 받으며 “눈물 바다”를 건너는 “종이 봉지 공주”처럼 살았다. 그 때 알게 되었다. 동화는, 사실 아이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상처입은 어른들을 위한 이야기라는 것을. 현실과 상상이 교차하는 동화의 자리에서 의외의 위로가 슬그머니 곁에 와 앉는다는 사실은 놀라운 생각의 전환이었다. 권정생 선생은, 그렇게 동화로 향하던 내 여정 위에서 마주한 소중한 이름이었다. 강아지똥, 몽실언니, 이 외에도 셀 수 없이 수많은 동화들. 어릴 때 잘 알지 못하고 쉽게 읽었던 동화책을 다시 읽으며 감탄과 탄식을 저절로 흘러나왔다. 그리고 그 분이 남긴 산문집, <우리들의 하느님>은 다시금 내게 한국에서의 신학함과 한 생명으로 이 땅을 살아간다는 일 자체를 엄숙하게 돌아보게 만들었다.

사실 고 권정생 선생은 삶 자체가, 그 분의 동화와도 같았다. 허름한 토방에서 일생을 보낸 그는, 생쥐와 함께 밥을 나눠먹을 정도로 가난했다. 최근에 출간된 <선생님 요즘은 어떠하십니까>에서 소개된 이오덕 선생과의 사이에서 오고갔던 고 권정생 선생의 편지를 읽으며 참 많이 부끄러웠고, 참 많이 울었다. 평생을 안동의 작은 교회의 종지기로 살았던 그는, 세상의 가장 작고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와 생명들의 이야기를 동화로 그려냈다. 자신의 동화가 출판되면서 사례금을 가져온 출판사 직원에게 쌀 한가마니 보다 훨씬 많은 돈을 확인하고는 절대 받을 수 없다고 거절했다는 일화나 방송국에서 <몽실언니>를 “책책책” 프로그램에 선정해서 방송하려 했으나 한사코 만류했다는 일화. 오늘날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세상을 살다간 한 사람의 삶이 고스란히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이 책, <우리들의 하느님>은 따뜻한 시선으로 그가 바라보는 이 땅의 교회와, 신학과, 삶에 대한 이야기아 담겨 있었다. 일생을 독신으로 산 그가 담담하게 아이들과의 이야기 속에 내어놓은 속마음은 내게 슬며시 웃음을 짓게 만들었다. 외로운 밤이면 선생이 말한 것처럼 내 옆에도 오른쪽과 왼쪽에 하느님과 예수님이 있다고 생각하면 우습지만 가슴이 따뜻해졌다.
가끔 가다가 아이들이 묻는다.
“집사님, 밤에 혼자서 무섭지 않나요?"
그러면 나는 시치미를 뚝 떼고 대답한다.
“무섭지 않다. 혼자가 아니고 내가 가운데 누우면 오른쪽에 하느님이 눕고 왼쪽에 예수님이 누워서 꼭 붙여서 잔단다."
아이들은 눈이 땡그랗게 되어 다시 묻는다.
“진짜예요?"
“그럼, 진짜지."
“그럼 자고 나서 하느님하고 예수님은 어디로 가요?"
“하느님은 콩 팔러 가시고, 예수님은 산으로 들로 다녀오신단다."
이쯤되면 아이들은 갈피를 못 잡고 더이상 질문도 못 한다. 외롭다고 쩨쩨하게 밖으로 푯대내고 사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혼자서 꾹꾹 숨겨놓고 태연스레 살 뿐이다. 하느님이 계속 침묵하시듯 우리도 입 다물고 견디는 것뿐이다.

또한, 생명의 위기를 맞은 21세기를 성찰하고 던지는 그의 질문은, 그 어떤 거창한 에큐메니컬 포럼이나 기독교 생태 윤리 수업에서도 생각해보지 못한 깊은 울림을 주기도 했다.
“오늘날 이 지구 위엔 평화를 위해 헌신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만, 그러나 아직도 끔찍한 살인과 약탈은 끊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고도의 지능으로 속임수를 써가며 죽이며 빼앗습니다. 그 방법이 너무나 교묘하기 때문에 누가 가해자고 누가 피해자인지 분간이 잘 되지 않습니다. 어떻게 잘못 판단하면 어느새 나 자신이 끔찍한 흉악범의 편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입고 있는 옷과 오늘 아침에 먹은 음식과 그리고 무엇을 지니고 있는가 모두가 정당한 것인지 생각해보셨나요?”

여러 경로를 통해 다양한 전세계의 신학을 접하게 되면서, 한국의 신학은 과연 무엇인지 묻는 외국 친구들에게 말문이 막힐 때가 참 많았다. 우리의 신학교에서 배우고 있는 신학이 과연 한국신학이라고 할 수 있는지, 교회사 면면에 흐르고 있는 서구 신학의 뿌리깊은 영향력들을 과연 어디까지 수용하고 얼마나 소화시켜 우리의 것과 접목시키고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끊이지 않았다. 그래서 참 의외였다. 그에 대한 응답을 찾기 위해 수없이 탐독했던 신학 서적에서는 오히려 모호한 개념들만 난무했는데, 의외로 이 산문집에서 내가 찾던 답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와 같이 기독교가 있기 때문에 하느님이 있고, 교회에 가서 울부짖는다고 하느님이 역사하시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 .기독교가 있든 없든, 교회가 있든 없든, 하느님은 헤일 수 없는 아득한 세월 동안 우주를 다스려왔다. 선교사가 하느님을 전파하면 하느님이 거기 따라다니며 머물고 같이 사는 게 아니라, 기독교가 전파되기 전부터 하느님은 어디서나 온세계 만물을 보살펴오셨다. 하느님은 지식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레 느낌으로 알 수 있는 것이 인간들의 마음이다. 종교는 하느님의 섭리에 따르려는 의지이지, 종교가 요구하는 대로 하느님의 섭리를 바꾸는 게 아니라. 하느님의 섭리는 바로 자연의 섭리가 된다. 하느님은 누구에 의해 만들어진 분이 아니라 스스로 계시는 분이라 했다. 그러니 하느님은 곧 자연인 것이다.

————— (중략)

한국인들에게는 아름다운 관습이 참으로 많다. 가족 중에 누군가 먼길을 떠나면 그날부터 끼니마다 밥을 한그릇씩 떠놓는다. 그 떠놓은 밥을 우연히 집에 찾아오는 나그네가 있으면 기꺼이 대접한다. 아무리 가난한 집에도 일단 집에 찾아온 손님은 박대하지 않고 먹이고 재워준다. 좀 여유가 있는 집에서는 아예 사랑채를 비워놓고 나그네를 받아들였다. 심지어 들판에서 점심을 먹다가도 지나가는 나그네가 있으면 큰 소리로 불러 함께 점심을 먹는다. 이렇듯 나누는 일을 철저했다. 조상에게 제사지낸 음식마저도 절대 혼자 먹지 낳고 이웃끼리 나누어 먹는다. ‘고수레’로 들판에 던진 음식은 벌레도 먹고 새도 먹는다. 가을 감나무 꼭대기의 까치밥과 까마귀밥은 눈물겹도록 아름다운 자연과의 사랑이다. 한국의 모든 교회는 이런 것을 새롭게 배워야 한다. 서구인들이 마음대로 변질시켜 놓은 예수의 참된 복음을 깨닫는다면, 창조 이래 이 땅에서 역사하신 하느님의 숨결을 금방 찾아낼 것이다.

어떤 목회자가 될 것인가. 여성 목회자 후보생으로서, 신학을 공부하는 3년의 과정 속에서 수많은 목회의 지침과 방향을 배우게 된다. 전도사라는 타이틀, 목회자 후보생이라는 딱지를 떼고 남는 나 자신의 모습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며, 신학함을 기경하는 이 짧은 시간동안 나는 <우리들의 하느님>에서 읽은 이 글귀를 마음에 새기고자 한다. 신학을 공부하는 이 땅의 모든 신학생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중략) 나는 신학이 어떤 것인지 잘 모르지만 올바른 신학을 한다면 농학, 인간학, 자연학을 함께 공부해야 한다고 본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세상에 오신 예수는 추상적이며 관념에 머문 신학을 가르치지 않았다. 입으로 설교하는 목회가 아니라 몸으로 살아가는 목회자가 있어야 한다. 밭을 갈고 씨뿌리고 김매고 똥짐을 지는 농사꾼이 바로 이 땅의 목회자다.

2016 PUTS 독후감
전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