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PUTS] 성령이 불어오면(예배의 실제, 설교문)
Studium
PUTS
작성자
在耳
작성일
2024-08-19 06:20
조회
209
I. 서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참 좋은 계절입니다. 오늘도 여러분의 삶에 불어오는 성령의 바람을 느끼시길 빕니다. 옆에 있는 분들과 이렇게 인사할까요? “성령이 붑니다. 성령이 불어옵니다.” 여러분들은 계절의 변화를 어떻게 느끼시는지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저희 집 안방에서 내다보이는 은행나무를 통해 계절을 확인하곤 합니다. 25년 전 이사 왔을 때만 해도 아주 작은 묘목이었던 은행나무가 지금은 4층인 저희 집에서 위로 높이 올려다보아도 그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훌쩍 자랐는데요. 저는 이 은행나무를 보고, 은행나무도 꽃이 핀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화려한 색깔을 자랑하는 봄꽃들 사이에서, 사실 은행나무 꽃은 족보도 내밀기 어렵습니다. 아주 짧은 기간 동안 피었다 금세 지고 말 뿐더러 모양도 볼품없기 때문입니다. 은행나무 꽃의 특이한 점은 못생긴 것 말고도 하나 더 있습니다. 수정을 할 때, 벌이나 나비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오로지 바람에 의지하여 수정이 되고 살굿빛 열매를 맺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은행나무처럼 오로지 성령의 바람에 의지하여 수많은 열매를 맺은 초기 교회 공동체, 우리 믿음의 선배들의 가슴 벅찬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II. 제자들을 변화시키시고, 공동체로서의 교회를 태동시키신 성령님
마가의 다락방에 모인 제자들은 문을 걸어 잠근 채, 두려움 가득한 얼굴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행 1:4). 제자들은 흩어져 숨어 있어도 모자랄 것 같은 이때에, 한 장소에 모여 있었습니다. 부활 후에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며, 제자들에게 성령이 오실 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령님의 임재는 구약의 선지자 요엘을 통해 이미 오래전부터 전해졌던 약속이었습니다(욜 2:18). 그 약속을 붙잡고 제자들은 기도했습니다. 그때, 눈에 보이지 않는 성령님이 바람처럼 급하고 강하게 불어 와 온 집안을 가득 채웠습니다. 온 산에 봄꽃들이 만개하듯, 들불이 퍼져나가듯 성령님은 ‘불의 혀’라는 표현 그대로 각 사람에게 임했습니다. 성령을 받은 사람들은, 놀랍게도 각 나라 언어로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성령 강림 사건은 창세기 11장의 ‘바벨탑 사건’ 이후, 혼잡해진 언어로 소통하지 못하던 인류가 복음이라는 새로운 언어로 소통하기 시작한 놀라운 사건이었습니다. 성경은 바벨탑 사건으로 사람들의 언어가 혼잡하게 되었다고 이야기합니다. 언어가 혼잡해졌다는 것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말하는 혀’가 혼잡해졌다는 것이 아니라, ‘듣는 귀’가 혼잡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듣는 귀가 혼잡하게 되었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창세기 11장 7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그들이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이런 의미에서 바벨의 사건은 귀가 있으나, 그 귀로 들을 것을 제대로 듣지 못하게 된 사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일방적인 이기심으로 주도하던 이야기를 더 이상 듣지 못하도록 언어를 흩으셨습니다. 그런데 성령님께서 임하신 성령 강림 사건으로 새로운 귀를 여신 것입니다. 소외된 지방의 언어로 들리는 새로운 이야기들을, 높은 바벨탑의 맨 꼭대기에서 내려다보는 것이 아니라, 연약하고 낯선 삶의 맨 밑바닥에 내려가 보고 들을 수 있게 하셨습니다. 제자들의 삶의 맨 밑바닥에 성령님이 불어오셨습니다. 그때, 제자들은 그리스도의 공동체가 획일화된 개인으로 이루어진 모임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목소리에 기꺼이 귀를 기울이는 한 몸이 진정한 “공동체”라는 사실을 비로소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교회 공동체를 통해, 사도행전 1장 8절의 말씀이 현실화되었습니다.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복음이 전해지는 하나님의 선교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성령을 기다리던 제자들을 본받기 원하는 우리들은, 무엇을 위해 어떻게 기도해야 할까요? 남아공 성공회 사제인 마이클 랩슬리는, 남아공의 인종격리 정책에 저항하다가 폭탄테러를 당해 두 손과 한쪽 눈을 잃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불편함의 축복을 주시기를 기원합니다. 손쉬운 답변들, 반쪽 진실들, 그리고 피상적인 인간관계에 견딜 수 없는 불편함을 느끼고 당신이 담대하게 진리를 추구하고 마음 깊이 사랑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분노의 축복을 주시기를 기원합니다. 사람들에 대한 불의, 억압, 착취에 거룩한 분노를 느끼고 당신이 정의, 자유, 평화를 위해 피곤을 모르고 일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눈물의 축복을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고통, 거부, 굶주림, 혹은 소중한 것들의 상실 때문에 고난 받는 이들과 함께 흘리는 눈물로 당신이 손을 뻗쳐서 그들을 위로하고 그들의 고통을 기쁨으로 바꿀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어리석음의 축복을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당신이 이 세상에서 진정으로 변화를 만들 수 있다고 믿는 어리석음의 축복을 받아서 남들이 할 수 없다고 하는 일들을 하나님의 은혜로써 해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III. 성령의 바람이 불어올 때, 나와 우리 그리고 교회는 어디에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불어온 성령의 방식은, 쌓기만 하려는 바벨의 방식과는 정반대의 방식입니다. 귀를 열어야 합니다. 내려가야 합니다. 불편합니다. 화가 나고, 눈물이 납니다.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손가락질 받을지도 모릅니다. 시날 평지에 바벨탑을 쌓는 것보다, 광야에 장미꽃 한 송이가 피게 하는 것이 더 불가능해 보이는 일일지도 모릅니다. 도시의 보도블록 사이에 간신히 피어난 민들레처럼 꽃 한 송이를 피우는 것조차 힘겹습니다. 변두리의 잡초처럼 늘 뿌리 뽑혀도 봄이 되면, 다시금 온 들판을 노랗게 물들이는 민들레의 영성은 사실 우리 예수님의 삶이셨습니다. 철저히 주변인이셨던 예수님은 버림받은 이방인, 세리, 여성, 가난한 자, 억압받는 이들과 영문 밖에서 어울리셨습니다. 동일성이 지배하는 주류 사회로 편입하지 않았던, 민들레의 영성이셨습니다. 히브리서 13장 13절에서, 믿음의 선조들은 우리들에게 이렇게 권면합니다. “그런즉 우리도 그의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봄날, 바람에 날리는 민들레가 아낌없이 홀씨를 내어주듯, 불의 혀처럼 불어오는 성령의 바람에 우리의 몸을 맡기지 않으시겠습니까? 우리가 그렇게 성령의 바람에 우리를 내어드릴 때, 성령의 바람에 실려 온 다른 사람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때, 채우고 쌓으려는 다툼에서 내려와 빈손으로 씨앗을 뿌릴 때, 작고 보잘것없는 민들레가 온 대지를 가득 채우듯, 그렇게 성령의 열매들이 우리를 통해, 우리가 몸담고 있는 우리 교회를 통해, 풍성하게 맺힐 것입니다. 오늘도 성령이 불어옵니다. 성령이 불어오면, 여러분은 어디에 계시겠습니까? 기도하시겠습니다.
[예배의 실제] 2016. 10. 12 @ PUTS
설교 제목: 성령이 불어오면
설교 본문: 창 11:1-9, 행 2:1-4
설교자: 정희경(양재 화원교회 담임목사 설정)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참 좋은 계절입니다. 오늘도 여러분의 삶에 불어오는 성령의 바람을 느끼시길 빕니다. 옆에 있는 분들과 이렇게 인사할까요? “성령이 붑니다. 성령이 불어옵니다.” 여러분들은 계절의 변화를 어떻게 느끼시는지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저희 집 안방에서 내다보이는 은행나무를 통해 계절을 확인하곤 합니다. 25년 전 이사 왔을 때만 해도 아주 작은 묘목이었던 은행나무가 지금은 4층인 저희 집에서 위로 높이 올려다보아도 그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훌쩍 자랐는데요. 저는 이 은행나무를 보고, 은행나무도 꽃이 핀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화려한 색깔을 자랑하는 봄꽃들 사이에서, 사실 은행나무 꽃은 족보도 내밀기 어렵습니다. 아주 짧은 기간 동안 피었다 금세 지고 말 뿐더러 모양도 볼품없기 때문입니다. 은행나무 꽃의 특이한 점은 못생긴 것 말고도 하나 더 있습니다. 수정을 할 때, 벌이나 나비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오로지 바람에 의지하여 수정이 되고 살굿빛 열매를 맺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은행나무처럼 오로지 성령의 바람에 의지하여 수많은 열매를 맺은 초기 교회 공동체, 우리 믿음의 선배들의 가슴 벅찬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II. 제자들을 변화시키시고, 공동체로서의 교회를 태동시키신 성령님
마가의 다락방에 모인 제자들은 문을 걸어 잠근 채, 두려움 가득한 얼굴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행 1:4). 제자들은 흩어져 숨어 있어도 모자랄 것 같은 이때에, 한 장소에 모여 있었습니다. 부활 후에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며, 제자들에게 성령이 오실 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령님의 임재는 구약의 선지자 요엘을 통해 이미 오래전부터 전해졌던 약속이었습니다(욜 2:18). 그 약속을 붙잡고 제자들은 기도했습니다. 그때, 눈에 보이지 않는 성령님이 바람처럼 급하고 강하게 불어 와 온 집안을 가득 채웠습니다. 온 산에 봄꽃들이 만개하듯, 들불이 퍼져나가듯 성령님은 ‘불의 혀’라는 표현 그대로 각 사람에게 임했습니다. 성령을 받은 사람들은, 놀랍게도 각 나라 언어로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성령 강림 사건은 창세기 11장의 ‘바벨탑 사건’ 이후, 혼잡해진 언어로 소통하지 못하던 인류가 복음이라는 새로운 언어로 소통하기 시작한 놀라운 사건이었습니다. 성경은 바벨탑 사건으로 사람들의 언어가 혼잡하게 되었다고 이야기합니다. 언어가 혼잡해졌다는 것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말하는 혀’가 혼잡해졌다는 것이 아니라, ‘듣는 귀’가 혼잡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듣는 귀가 혼잡하게 되었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창세기 11장 7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그들이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이런 의미에서 바벨의 사건은 귀가 있으나, 그 귀로 들을 것을 제대로 듣지 못하게 된 사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일방적인 이기심으로 주도하던 이야기를 더 이상 듣지 못하도록 언어를 흩으셨습니다. 그런데 성령님께서 임하신 성령 강림 사건으로 새로운 귀를 여신 것입니다. 소외된 지방의 언어로 들리는 새로운 이야기들을, 높은 바벨탑의 맨 꼭대기에서 내려다보는 것이 아니라, 연약하고 낯선 삶의 맨 밑바닥에 내려가 보고 들을 수 있게 하셨습니다. 제자들의 삶의 맨 밑바닥에 성령님이 불어오셨습니다. 그때, 제자들은 그리스도의 공동체가 획일화된 개인으로 이루어진 모임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목소리에 기꺼이 귀를 기울이는 한 몸이 진정한 “공동체”라는 사실을 비로소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교회 공동체를 통해, 사도행전 1장 8절의 말씀이 현실화되었습니다.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복음이 전해지는 하나님의 선교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성령을 기다리던 제자들을 본받기 원하는 우리들은, 무엇을 위해 어떻게 기도해야 할까요? 남아공 성공회 사제인 마이클 랩슬리는, 남아공의 인종격리 정책에 저항하다가 폭탄테러를 당해 두 손과 한쪽 눈을 잃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불편함의 축복을 주시기를 기원합니다. 손쉬운 답변들, 반쪽 진실들, 그리고 피상적인 인간관계에 견딜 수 없는 불편함을 느끼고 당신이 담대하게 진리를 추구하고 마음 깊이 사랑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분노의 축복을 주시기를 기원합니다. 사람들에 대한 불의, 억압, 착취에 거룩한 분노를 느끼고 당신이 정의, 자유, 평화를 위해 피곤을 모르고 일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눈물의 축복을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고통, 거부, 굶주림, 혹은 소중한 것들의 상실 때문에 고난 받는 이들과 함께 흘리는 눈물로 당신이 손을 뻗쳐서 그들을 위로하고 그들의 고통을 기쁨으로 바꿀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어리석음의 축복을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당신이 이 세상에서 진정으로 변화를 만들 수 있다고 믿는 어리석음의 축복을 받아서 남들이 할 수 없다고 하는 일들을 하나님의 은혜로써 해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III. 성령의 바람이 불어올 때, 나와 우리 그리고 교회는 어디에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불어온 성령의 방식은, 쌓기만 하려는 바벨의 방식과는 정반대의 방식입니다. 귀를 열어야 합니다. 내려가야 합니다. 불편합니다. 화가 나고, 눈물이 납니다.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손가락질 받을지도 모릅니다. 시날 평지에 바벨탑을 쌓는 것보다, 광야에 장미꽃 한 송이가 피게 하는 것이 더 불가능해 보이는 일일지도 모릅니다. 도시의 보도블록 사이에 간신히 피어난 민들레처럼 꽃 한 송이를 피우는 것조차 힘겹습니다. 변두리의 잡초처럼 늘 뿌리 뽑혀도 봄이 되면, 다시금 온 들판을 노랗게 물들이는 민들레의 영성은 사실 우리 예수님의 삶이셨습니다. 철저히 주변인이셨던 예수님은 버림받은 이방인, 세리, 여성, 가난한 자, 억압받는 이들과 영문 밖에서 어울리셨습니다. 동일성이 지배하는 주류 사회로 편입하지 않았던, 민들레의 영성이셨습니다. 히브리서 13장 13절에서, 믿음의 선조들은 우리들에게 이렇게 권면합니다. “그런즉 우리도 그의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봄날, 바람에 날리는 민들레가 아낌없이 홀씨를 내어주듯, 불의 혀처럼 불어오는 성령의 바람에 우리의 몸을 맡기지 않으시겠습니까? 우리가 그렇게 성령의 바람에 우리를 내어드릴 때, 성령의 바람에 실려 온 다른 사람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때, 채우고 쌓으려는 다툼에서 내려와 빈손으로 씨앗을 뿌릴 때, 작고 보잘것없는 민들레가 온 대지를 가득 채우듯, 그렇게 성령의 열매들이 우리를 통해, 우리가 몸담고 있는 우리 교회를 통해, 풍성하게 맺힐 것입니다. 오늘도 성령이 불어옵니다. 성령이 불어오면, 여러분은 어디에 계시겠습니까? 기도하시겠습니다.
[예배의 실제] 2016. 10. 12 @ PUTS
설교 제목: 성령이 불어오면
설교 본문: 창 11:1-9, 행 2:1-4
설교자: 정희경(양재 화원교회 담임목사 설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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