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PUTS] 감춰진 생명을 찾으라! (설교의 실제)

Studium
PUTS
작성자
在耳
작성일
2024-08-19 06:34
조회
249

성경본문 - 골로새서 2:20-3:4

20 너희가 세상의 초등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든 어찌하여 세상에 사는 것과 같이 규례에 순종하느냐 21 (곧 붙잡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하는 것이니 22 이 모든 것은 한때 쓰이고는 없어지리라) 사람의 명령과 가르침을 따르느냐 23 이런 것들은 자의적 숭배와 겸손과 몸을 괴롭게 하는 데는 지혜 있는 모양이나 오직 육체 따르는 것을 금하는 데는 조금도 유익이 없느니라 3:1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시느니라 2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3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 4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본문의 상황 설명

         내 사랑하는 고향 골로새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공동체를 세운지도 꽤 오랜 시간이 흘렀습니다. 리쿠스 골짜기를 평화롭게 뛰노는 양떼들, 고운자주빛으로 염색한 양털 꾸러미를 아낙들이 햇빛에 내다 말리는 모습을 창문 너머로 바라봅니다. 내 이름은 에바브라, 이 곳 리쿠스 계곡에 처음으로 복음을 전한 사람입니다. 문득 바울 선생님을 만났던 그 때가 떠오릅니다. 사업차 방문했던 에베소에서 저는 우연히 두란노 서원이라는 곳에 들렀습니다.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목소리로 담대하게 예수와 하나님 나라에 관해 이야기하던 바울 선생님. 말하자면 저는 그 분에게 세례를 받고 생명의 복음을 전수 받은제자입니다. 바울 선생님을 모시고 골로새까지 오고 싶었지만, 오히려 골로새 출신인 저에게 고향에 직접 복음을 전하고 공동체를 세우라는 귀한 일을 맡겨주셨습니다. 이교도인 저에게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참 낯설고도 새로운 이름이었습니다. 유대교의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는 풍문으로 들어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바울 선생님이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내용은 그것을 뛰어넘는 기이하고도 매우 위험한 그 무엇이었습니다.

         마음이 아프고 또 어렵습니다. 최근에, 새로 공동체에 들어온 사람들이 이전에 우리가 신을 섬기고 예배하던 방식이 훨씬 더 좋고 옳은 것이라며 이제 막 믿음의 발을 내딛은 사람들에게 큰 소리를 칩니다. 처음에는 설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고 거듭난 우리 공동체가 그 정도 수준의 논리에 흔들릴까 싶었습니다. 하지만 제 예상과는 달리 매주 조금씩 달라지는 성도들의 마음을 마주보는 눈빛에서 느낍니다. 근처의 라오디게아와 히에라볼리가 번성하면서 골로새가 예전만큼 크고 중요한 무역 도시로 각광받지 못하는 이유부터 시작해서 우리도 여타 다른 종교들처럼 최소한의 규칙과 규정들은만들고 지켜야 하는 것 아니냐는 불만섞인 이야기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옵니다. 그리스도의 공동체로 자유롭게 모여 그를 기념하는 음식을 나누는 일들에도 질서라는 이름으로 서열과 차별을 두어야 한다고 말입니다. 복음은 결코 그런 것이 아니라고 아무리 이야기해도 성도들은 이미 그들의 논리에 빠져 있습니다. 로마 감옥에 계신 바울 선생님을 만나 뵈러 가야겠습니다. 선생님이라면 제 이야기를 듣고 확실한 조언을 해 주실 수 있을 겁니다.

문제제기 상황으로의 초대

         에바브라. 골로새 교회를 개척한 목회자인 그는 믿음의 1세대 다운 열정과 자신이 세운 공동체에 대한 뜨거운 사랑으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그의 유일한 바람은 골로새 사람들이 성숙한 사람이 되어 하나님의 뜻에 대하여 확신을 가지고 든든히 설 수 있도록 항상 기도하는 것 뿐이었습니다(4:12). 고향인 골로새뿐만 아니라 근처에 있는 라오디게아와 히에라볼리에 있는 사람들에게까지 복음 전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4:13). 대부분 이방인 회심자였던 골로새 성도들은 에바브라를 통해서 복음을 받아들였을 때, 헬라화되어 있던 기존의 삶의 방식과 가치관이 완전히 전복되는 변화를 겪어야만 했습니다. 그 당시 시대를 풍미하고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었던 헬라사상은 로마 제국의 평화와 번영이라는 미명 아래, 종교와 문화의 혼합주의로 가득찬 것이었습니다. 어떤 것이든 헬레니즘의 체계 안으로 녹여내어 제국의 한 요소로 삼아버리는 거대한 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로마의 헬레니즘 사상은 잘 정비한 군사로와 바닷길을 통해 로마 제국 내의 다양한 민족들과 그들이 가진 문화의 상호 이동과 혼합을 조장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골로새 교회는 이러한 로마 제국 시대이 소아시아 지역에 자리한 작은 무역도시였습니다. 각종 철학과 종교사상이 혼합되는 소용돌이의 한복판에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이런시대의 풍조와 사상 속에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혁명적이게도 제국과 가이사의 평화를 거부하겠다는 명백한 의지의 표명이었습니다. 로마 제국이전파한 팍스 로마나(Pax Romana)의 구체적인 결과물들은 황제의 초상이 기념비처럼 새겨진 동전들, 도시의 성문과 신전 곳곳을 가득 채운 황제 숭배 사상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평화는 동전의 한쪽에는 평화의 여신이, 다른 쪽에는 무기가 새겨져 있는 누군가의 평화를 처참하게 부수고 얻어낸 피비린내 나는 평화였습니다. 세금을 바치는 사람들에게만 주어지는 평화는 누군가를 노예로 만들었고, 세금을 낼 수 없는 누군가는 이방인으로 만드는 구조적으로이미 불평등한 평화였습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예배하는 공동체는 전혀 다른 하나님 나라의 평화를 구체적으로 실현하는 모임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가져온 화해라는 이름의 평화는 자신이 십자가에서 죽음으로 성취한 것이었습니다. 제국의 구석구석에 퍼져있는 사회적인 차별과 분열을 수용하지 않고, 복수나 폭력으로 평화를 지키려고 애쓸 필요도 없었습니다. 우리라는 이름의 공동체는 성별과 인종, 신분과 재산에 따라 차별하지 않는 가슴벅찬 희망을 그려내는 모임이었습니다. 그러니 예수에 대한 헌신은 결코 제국에서는 용납될 수 없는 성질의 것이었습니다. 제국에 더욱 좋은 시민으로 만들고 제국에 대한 의무를 헌신적으로 수행하게 돕는 이집트의 이시스 여신이나 로마의 아폴로 신에게 바치는 숭배와는 달리,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제국에 커다란위협을 끼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적인 영역에 그치는 개인의 회심을 넘어서서 공적으로 황제 숭배를 위한 기부나, 제국의 축제를 위한 물품을 공급하는 일을 포기한다거나, 가이사와 그의 승리를 보여주는 모든 형상들을 제거하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에바브로가 세웠던 소아시아 지역의 골로새 공동체의 성도들은 복음을 받아들이고, 그리스도의 복음에 순종 하기로 결단하면서도 쉽지 않은 고민을 했을 것입니다. 어느 정도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야할까? 예수 그리스도를 삶의 모든 영역에서 주님으로 모신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이방 신을 섬기던 방식과 예수 그리스도의 평화의 공동체로 모여 함께예배하는 방식은 어떻게 달라야 할까? 유치하지만 한 종교가 다른 종교를 구분짓는 방식처럼 새로운 의식을 만들고 독특한 제도로 자신들의 우월성을 드러내고 싶었을지도 모릅니다. 이렇게 골로새 성도들이 고민하고 있는 와중에, 이른바 골로새 이단이라고 불릴만한 사람들이 공동체에 들어와 꽤나 매력적인 규례들을 그들 앞에 펼쳐 놓았습니다.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았던 외부 종교의 규례와 규칙들이 지혜롭게 느껴집니다. 유대교의 엄격한 음식 규례와 절기나 축제에 대한 예식들. 우리들도 무언가를 지키고, 해야할 것만 같습니다. 오늘 저희가 함께 읽은 골로새 교회에게 보내는 편지 2장은 이런 골로새 성도들을 바라보는 안타까운 마음의 에바브라와, 그런 에바브라로부터  소식을 전해들은 바울의 단호하고도 명료한 답변입니다.

         덧없는 그림자 같은 육체와 다른 ‘실체’ 세계는 우리가 보는 것을 단순히 비춰주기만 하기 때문에 본질을 접하기 위해서는 외적으로 보이는 현상의 배후로 들어가야 할 필요가 있다는 플라톤식의 방법에서부터 골로새 성도들은 ‘온전한 실체’에 접근하기 위하여 신의 대리인으로 여겨지는 천사를 숭배해야 한다는 이방 종교의 방법론을 들어왔을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역설적인 방법으로 그들의 생각을 뒤엎어 버립니다. 그림자의 반대인 본체는 바로 골로새 교인들이 믿는 그리스도라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상실한다는 것은 그러한 본체에 대한 접근법을 상실하는 것이며, 그리스도와 연합한다는 것은 충만함 가운데 삶을 살 수 있는 열쇠가 된다고 이야기 합니다. 골로새의 거짓 교사들은 육체의 욕망을 제어할 수 있는 다양한 규정들을 제시했습니다. 역설적으로 인간의 욕망을 애초에 거세해 버리는 금욕주의와 자기 부정의 방법으로, 다른 이방 종교나 다른 사람들보다 ‘뛰어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는 욕망을 부추기고 있다는 사실을 꼬집습니다. 하지만 ‘붙잡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건드리지도 말라’는 부정적인 요구로 점철된 종교는 그 주장이 무엇이든 간에 인간을 결코 만족시킬 수 없습니다. 육체의 욕망을 제어하게 된 유익은 다시 육체로 회귀하게 되는데, 그것은 어떤 외적인 규범이나 규례(20절)에 의한 것이 아니라 내적으로부터 오는 근본적인 변화로 인해 궁극적인 목적을 성취한다는 사실을 바울을 지적합니다. 겸손을 자랑하기 위해 겸손하고자 하는 인간의 본질적인 성취욕구를 극복하지 못한다면 아이러니하게도 원래의 목적과는 정반대의 결과를 가져오게 합니다. 겸손하려는 이유가 겸손하다는 것을 자랑하기 위해서라면, 경건하려는 이유가 다른 사람보다 나은 종교적인 사람으로 보이기 위함이라면, 몸을 괴롭게 하는 이유가 자기 만족을 위해서라면, 이런 모든 행위들이 어떤 의미를 갖겠습니까. 근본적인 변화없는 외적인 종교 행위만으로는 애초에 골로새 교인들이 떠나온 이방종교와 조금도 다를 것이 없습니다.

본문에 대한 재접근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다른 종교인들과 다르게 살 수 있을까요? 아니, 어떻게 다르게 이 땅을 살아간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을까요? 바울은 삶의 토대를 이루고 방향을 지도해 주는 이야기가 없이는 실천적인 삶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이야기합니다. 로마 제국과 하나님 나라가 바로 그들이 선택해야할 이야기였습니다. 이야기에 의존해서 살 수 밖에 없는 인간의 본질은 그러므로 어떤 이야기에, 아니 누구의 이야기에 근거해서 살 것인지가 훨씬 중요하다는 사실을 골로새 교인들에게 일깨웁니다. 이미 로마제국은 도덕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마비증상과도 같은 위기를 맞고 있다는 사실을 앞에서 지적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은 어떤 이야기가 이미 생명을 가져오는지 알고 있습니다. 누구의 이야기가 골로새 교인들에게 기존의 방식을 벗어나 새로운 세상을 꿈꾸게 하고 자유롭게 해 주었는지를 냉철한 어조로 이야기합니다.

         메시지 성경으로 1-2절을 읽겠습니다. “여러분이 진심으로 그리스도와 더불어 이 새로운 부활의 삶을 살고자 한다면, 그렇게 행하십시오. 그리스도께서 주관하시는 것들을 추구하십시오. 발을 질질 끌며 땅만 쳐다보고 다니거나, 바로 눈앞에 있는 것들에 관심을 빼앗기지 마십시오. 위를 바라보고, 그리스도 주위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에 주목하십시오. 정말 중요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곳은 바로 그곳입니다! 그분의 시각에서 사물을 보십시오.” 바울의 확신에 찬 편지를 읽으며 골로새 교인들은 이미 자신들이 경험한 부활(아나스타시스)를 떠올렸을 것입니다. 세례를 받으며 단호하게 고백했던 자신들의 믿음을 기억했을 것입니다. 바울은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지금 그리스도가 계신 그 곳에서 정말 중요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에 눈을 뜨라고 권면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이야기가 곧 그리스도인의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정체성과 운명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를 떠나서는 그 어떤 의미도 가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집중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계속 전진해야 하는 노력이 일상에서 필요하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위의 것을 찾으라”는 명령은 여기에서 비로소 제자리를 찾습니다. 바울은 단순히 내세를 지향하며 천국가는 일을 최우선으로 두고 살라는 의미에서 이런 명령을 던진 것이 아닙니다. ‘위의 것’을 추구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통치가 그리스도와 함께 이뤄지고 있다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관계를 지속하고 계시는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과의 관계를 지속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우편에 계시듯 우리도 하나님의 우편에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2절에서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생각하다’로 번역된 ‘프로네오’라는 헬라어 단어는, 바울 서신의 여러 문장에서 사용되고 있는데 ‘생각을 둔다’는 다소 정적인 표현뿐만 아니라 어떤 특정한 태도를 가지는 것으로도 번역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생각하는 방식은 그 사람이 살아가는 방식과 끈끈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밝혀주는 것입니다. ‘땅의 것’과 ‘위의 것’을 날카롭게 대조하고 있는 이 구절은 로마 제국과 하나님 나라의 분명한 구분을 보여줍니다. 바울은 결코 땅에 발을 딛고 사는 한 인간으로서 “몸 안에” 사는 것을 말할 때,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을 거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한 육체는 하나님이 선하게 창조하신 삶의 일부분이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바울은 그리스도인이 더이상 소속되어 있지 않은 옛 질서인 육체를 향하고 있는 삶의 방향에 대한 거절을 권고합니다. 그리스도인들에 훈련해야 하는 것은 육체의 훈련으로 외형적으로 보여지는 자의적 숭배나, 겸손, 몸을 괴롭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생각의 방향성을 바꾸는 것! 바로 이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인들의 일상은 죽음과 생명이 매순간 교차하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죽은 자들이며, 동시에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죽음에 관하여는 이 세상에 대하여 십자가에 못박혔고, 세상은 그리스도인에 대해서 십자가에 못박혔습니다(갈 6:14)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 로마 제국이 세상을 통치하는 방식에 대하여 이미 죽은 사람들입니다.

클라이막스

         죽었습니다. 죽은 사람의 생명은 더이상 죽은 사람의 몫이 아닙니다. 그 생명은 생명의 창조주에게 돌아갑니다. 바울은 이 당연한 창조의 원리를 언급함으로써, 골로새 성도들에게 결코 양보할 수 없는 신앙에 대한 권면의 마지막 쐐기를 박습니다. ‘이미 죽었다’는 표현을 통해 과거의 죽음을 상기시키고, ‘생명’에 대해서는 현재와 미래형의 어휘를 사용함으로써 시간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지혜를 생각하게 합니다. 현재와 미래의 생명이 불완전한 우리에게 없다는 사실은 역설적이게도 우리의 생명이 철저하게 확보되어 있으며, 완전한 보호 아래에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합니다. 바로 여기에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이 있으며, 세상 사람들과는 명백하게 다른 구별점이 찍힙니다. 생명이 그리스도 안에 감추어져 있는 만큼 그리스도인들은 부요한 사람들인데, 그리스도와의 생명적인 관계 속에서 이뤄지는 부요함입니다. 만약 그리스도인들이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춰져 있다는 사실을 확신한다면,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강하고 부요한 자들로 살게 됩니다. 그 어떤 상황이나 변화에도 요동하지 않는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이 생명으로 인하여 다른 사람들을 부요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감춰져 있는 그 생명이 무엇입니까. 단순히 생명을 그리스도와 함께 나눠가지는 나눠먹기 식의 생명이 아닙니다. 바울은 생명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고 단언합니다. 바울 자신을 포함한 모든 믿는 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생명이라고 말입니다. 1절에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자리를 하나님의 우편에 계시다고 언급했습니다. 하나님 우편에 계신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는 아직은 움직이지 않고 계시는 부동 자세의 예수님을 봅니다. 그러나 언젠가 예수님께서 움직여 나타나실(4절) 때에, 우리의 생명도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날 것이라고 선포합니다. 그리고 그 영광의 모습은 하나님의 형상을 온전히 회복하고, 새롭게 되고, 풍성한 열매를 맺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기 전에 이 땅을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무엇인가를 행할 것을 요청하신다는 말이며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일이 결코 헛되지 않다는 사실을 반증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정해진 때까지 기다리고 계신 것처럼, 그리스도인으로서 알려지지 않는 생명을 이 땅에서 감추고 살더라도 자족할 수 있다는 사실을 역설합니다.

재조명 확장

         브라이언 왈쉬는 책 <제국과 천국>에서 바울의 권고를 이렇게 해석합니다. “세상 가치관에 대한 잘못된 충성심을 버리고 그대를 사로잡고 있는 오만한 권세들에게 벗어나라. 당신의 삶을 왜곡하는 권력과 돈, 천재와 전쟁, 바깥 공간과 내적 공허의 불경한 동맹들로부터 탈퇴하라’. 벗어나고 탈퇴하는 삶. 어디선가 한번쯤은 들어본 이야기 같습니다. 전적으로 복음에 일평생을 걸겠다는 자기소개서, 예수 그리스도를 죽기까지 따르겠다는 신대원 면접장에서 했던 결의에 찬 고백. 그 모든 의지가 집약적으로 표출된 증거가 오늘 여기, 설교의 실제 소예배실에 앉아 있는 우리의 모습일 것입니다. 하지만 불안합니다. 어디까지 어떻게 순종해야 할지조차 가늠하기 어렵습니다. 하루에도 몇번씩 죽었다 살았다를 반복합니다. 신학교에서 보낸 3년이라는 시간조차도 불충분하다고 느낍니다. 입학하면서 그려 보았던, 당연히 될 수 있을 것 같았던 목회자의 모습에 여전히 도달하지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맞습니다. 우리는여전히 불완전한 존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치 불완전하지 않은 것처럼 주제넘게 생각하면 바로 골로새 교회가 바울을 통해 경고 받았던 우상 숭배나 거짓 교사의 가르침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소망 가운데 삽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만물을 회복하실 하나님의 통치와 스스로 통치권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거짓되고 공허한 세상 권력 사이의 다툼. 그 속에서 지금 우리는 몸에 대하여, 공동체에 대하여, 문화에 대하여 질 수 없는 싸움을 하고있습니다. 그리스도가 다시 오실 그 때에 이 모든 싸움은 완전히, 완벽하게 종결될 것입니다.

         그렇지만 오늘도 우리는 기다리는 중입니다. 시인 황지우의 고백처럼, ‘세상에서 기다리는 일처럼 가슴 애리는 일이 또 있을까요. 아주 먼 데서 지금도 천천히 오고 있는 그 분을, 그 분을 기다리는 동안 우리도 가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기다리는 그 생명은 우리를 위해 이미 그리스도의 통치 안에 다 준비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장차 그분이 오실 때 환하게 그 모습을 드러낼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처럼 모든 것이 뒤바뀌는 그 날을 소망하면서 현재의 삶을 살아내야 할 것입니다.

결론 권면

         이미와 아직의 시간 사이에 있는 우리는 어떻게 10억 광년과도 같은 시공을 기다림으로 채울 수 있을까요. 죽고도 살아있는, 이렇게 말도 안되는 역설로 가득찬 가난하고도 부요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낼 수 있을까요. 이제는 자취도 찾아볼 수 없는 골로새 교회에 바울이 쓴 이 편지가 2000년도 지난 우리에게 들려주는 이야기가 오늘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단순한 글자를 넘어서는 그들의 삶을 철저히 전복시킨 생명을 주는 진리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로마의 감옥에 갇혀 있는 바울을 방문한 에바브라는 결국 바울과 “함께 갇힌”(몬 23절) 자가 됩니다. 지도자인 에바브라의 투옥 소식과 사도 바울의  바울의 편지를 전하러 골로새에 온 두기고는 아마도 골로새 공동체에 문제를 일으키고 도망친 노예 오네시모와 함께였을 것입니다. 도망친 노예가 도망쳤던 그 자리로 다시 돌아와 전하는 복음의 진정성은 세상이 감히 감당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시인 박노해는 우리네 삶을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은 나무와 같아서 위로 높이 솟아오를수록 땅속 깊이 뿌리내려야 한다."

         로마 제국의 심장부에서 예수를 담대하게 좇아 살았던, 그 어떤 제도나 규례에도 얽매이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뛰어넘어 강렬하게 이 세상을 살다간 수많은 믿음의 선조들이 바울의 목소리를 빌려 우리에게 오늘도 도전합니다. “위의 것을 찾으라! 감춰진 생명을 찾으라!”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목회자 후보생으로서 우리의 삶으로 말하고 있는 오늘의 복음은 감히 꿈꿀 수 없었던 삶을 담대하게 살아가게 하는 근본적인 힘이며, 우리의 참 생명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다시 오는 그 날을, 오늘도 조금씩 땅 속으로 깊이 뿌리 내리며 기다리십시다. 기도하시겠습니다.

2016. 5 설교의 실제 (강해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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