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콘클라베
Review
작성자
在耳
작성일
2025-06-09 00:14
조회
186
어둠 속에 봉인된 사람들
영화는 갑작스런 교황의 죽음을 맞닥뜨린 바티칸의 당혹감을, 어두운 길을 걷는 한 남자의 뒤를 따르며 조명한다.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다. 교황의 마지막 일정을 확인하는 일. 선종한 교황의 손가락에서 직인이 들어있는 반지를 빼내는 일. 다음 교황을 선출할 권한을 가진 추기경들이 한 자리에 모이는 일. 그리고 그들에게 제공될 음식들을 준비하는 일. 그러나, 순서는 어김없이 예외를 부른다. 규격화된 틀에 맞춰 움직이면 될 것 같은 일들이, 사사로운 눈빛과 교묘한 전략 사이에서 서서히 흔들리기 시작한다. 내내 권력의 주변부에 머물 것처럼 보였던 주인공 역시, 자신에게 몰려오는 표심에 스스로 외면하던 욕망 사이에서 결국 눈이 멀어갈 즈음, 영화는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들을 향해 격렬하게 펼쳐진다.
눈과 귀가 열린 사람들
재미 신학자 이정용 박사는 자전적인 책 <마지널리티>에서, 주변화된 사람들의 역동성에 관해 말한 바 있다. 중심은 결코 알아차릴 수 없는 균열과, 그곳에서 벌어지는 자기파괴적인 경쟁. 주변화된 사람들의 눈에 포착되는 중심의 모순과 위선은 상상을 초월한다. 카불에서 온 추기경이 갑작스레 등장한 식탁에서, 식사 기도를 부탁받은 그가 익숙한 라틴어 기도 뒤에 , 스페인어로 뜻밖의 기도를 덧붙인다. 수녀가 굳게 감고 있던 눈을 번쩍 뜨게 만든 바로 그 장면. ‘확신을 의심하라.’ 진리는 올곧은 것이지만 동시에 부드럽기에 휘어질 수 있다. 원칙과 전통, 의심과 회의 사이에 놓인 진리는, 그동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던 사람들의 입을 통해 드러난다.
사람들, IMAGO DEI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으로 창조되었다. 창세기에서 천명한 이 엄숙한 명제를 어느 그리스도인이 감히 부정하겠는가. 하지만 당신이 거룩하게 여기는 상대가, 당신이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면, 그때도 우리는 그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영화는 모든 갈등이 해소되었다고 느껴지는 마지막 순간에 이르러, 가장 깊숙이 감춰졌던 질문 하나를 관객에게 던지며 끝을 맺는다. 신학자 무사 두베(Musa Dube)는, 아프리카 교회에서 터부시되는 HIV에 관한 캠페인을 전개하며 “공동체의 한 지체가 감염되어 아프다면, 하나님도 아프시다”는 도발적인 신학적 선언으로 우리들의 무감각을 일깨운 바 있다.
종교가 사라지는 시대, 종교성이 오히려 조롱받는 시대. 그 속에서 우리의 자리는 어디여야 하는가. 아니, 우리는 지금 어디에 서 있는가.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 문을 열고 달려나가던 소녀들의 청량한 웃음소리처럼, 우리는 굳게 닫힌 문들을 선한 힘으로 열어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교황에서 주어지는, 진짜 ‘천국의 열쇠’아닐까. 202504 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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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를 뉴욕행 비행기 안에서 보고 난 뒤, 애정하는 팟캐스트 <여자둘이 토크하고 있습니다>에 이런 감상평이 담긴 아래의 이메일을 보냈다. 이메일을 소개하던, 황선우 작가는 “톡토로는 어디에나 있죠. 교회 안에도 있습니다.”라는 말로 포문을 열었고, 이하나 작가는 마지막에 “하나님 할머니”라는 아주 마음에 드는 표현으로 마무리해 주었다. 공명하는 일, 이 땅의 문제에서 고개 돌리지 않는 일. 참 하나님이면서 동시에 참 사람이었던 예수님처럼 촘촘하게 일상 속 발걸음을 다시 내딛는다.
https://podcasts.apple.com/kr/podcast/여둘톡/id1617974770?i=1000699517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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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독일에 살고 있는 목재토로(목사 재이의 줄임말🤗)입니다. 원래 유럽 톡토로 유니버스에서는 목토로라고 자기 소개를 했는데, 생각해보니 늦깎이 톡토로 세계에 들어온 제가 모르는 (한국의) 목토로(예를 들어, 목동에 사시거나 나무(목)를 좋아하시는 톡토로)가 분명히 있을 것 같다는 확신(?)이 들어서요. 저는 독일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있는, 개신교 목사입니다.
오늘 이렇게 메일을 쓰는 이유는, 지난 주에 추천해주신 콘클라베를 지금 막 비행기 안에서 보고 밀려드는 여운 탓에 아무 것도 할 수 없어서 입니다. 그 덕분에 처음으로 ㅡ 드디어!! ㅡ 언니들께 팬레터와도 같은 이메일을 보낼 수 있게 되었네요! 오스트리아 항공 만만세!! 찡긋. (음식점, 여둘 애드 소개해 주실 때마다 귀국일만 손꼽아 기다린다는ㅎ 참, 선우 언니가 소개해준 디오디너리 세럼들은 저도 넘 잘 쓰고 있어요!!)
싱글 여성 목회자로서, 카톨릭 교회의 수녀님들만큼은 아니지만 종교와 교회라는 제도가 가져오는 무시무시한 무게와 갑갑함을 느끼는 경우가 많은데요. 다행히(!) 제가 속한 교단에서 목사 안수는 받았지만 여전히 많은 교단에서 여성은 아무리 신학을 공부해도, 안수조차 이뤄지지 않고 있어요. 하지만 안수를 받았다고 해서 차별이 없을까요. 콘클라베에서 나오는 문제들이 여전히 산재합니다. 국적에 대한 차별, 학벌에 따른 서열 다툼, 돌봄과 양육으로 한정되는 일자리. 토크니즘(Tokenism)으로 여겨지는 들러리 세우기. 한국의 개신교가 오늘날 종교개혁의 대상이라고 얘기할만큼, 기독교인이라고 말하는 일은 물론 목사라고 말하는 일도 참으로 힘겨운 요즘입니다. 영화 콘클라베가 제 안에서 공명을 일으킨 이유도, 어쩌면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희망은 결국 내 옆에 있는 사람 안에서 찾을 수 있다는 메시지 때문인지 모르겠어요. 금단의 벽을 허무는 이야기가 2025년에도 여전히 필요하다는 것. 그리고 그 벽은 분명히 무너질 것이라는 ‘믿음’이, 어쩌면 오늘의 우리를 지탱하는 힘이지 싶습니다. 마지막 장면에서 어린 소녀들이 열린 문으로 달려 나오던 것처럼요.
저는 독일 학생들에게 아시아 아프리카 여성 신학을 가르치고 있는데요. 전세계 멋진 언니들의 신학을 가르치면서, 금단의 벽에 조금씩 균열을 만드는 중입니다. 콘클라베를 보면서, 제가 좋아하는 현경 교수님의 “다시 태양이 되기 위하여(The struggle to be sun again)”의 한 대목을 나누며 첫 메일을 살포시 닫아봅니다. “원래 여자는 태양이었다. 그는 참 인간이었다. 그런데 이제 여자는 달이 되었다. 그는 다른 것에 기대서 살며 다른 빛을 반사해서 빛을 낼 뿐이다. 그의 얼굴은 창백한 병색이다. 이제 우리는 감추어진 태양을 다시 찾아야 한다 .“숨겨진 우리 태양을 밝히고 본래 우리의 선물을 다시 찾자!“ 이것은 우리 마음 속에 끝없이 울리는 외침이다 이것은 누를 길 없는 억누를 수 없는 우리의 욕구이다. 이것은 우리의 마지막 완전한 그리고 유일한 본능이다. 이를 통해 우리의 온갖 찢겨졌던 본능들이 하나가 된다.(103)“
시간 들여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매주 울림이 큰 목소리를 나눠주셔서 더 고맙습니다.
p.s. 두 분이 항상 영육간에 (업계 용어가 나왔…🤗) 강온하시길 여둘톡 들을 때마다 기도합니다. 다시 한번, 진심으로 감사드려요! 🙂
2025년 3월 9일,
미국행 비행기 안에서 횔활 타오르는마음으로, 목재토로 드림
(비행기 안에서 쓰고 뉴욕 공항 내리자마자 보냅니다)
영화는 갑작스런 교황의 죽음을 맞닥뜨린 바티칸의 당혹감을, 어두운 길을 걷는 한 남자의 뒤를 따르며 조명한다.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다. 교황의 마지막 일정을 확인하는 일. 선종한 교황의 손가락에서 직인이 들어있는 반지를 빼내는 일. 다음 교황을 선출할 권한을 가진 추기경들이 한 자리에 모이는 일. 그리고 그들에게 제공될 음식들을 준비하는 일. 그러나, 순서는 어김없이 예외를 부른다. 규격화된 틀에 맞춰 움직이면 될 것 같은 일들이, 사사로운 눈빛과 교묘한 전략 사이에서 서서히 흔들리기 시작한다. 내내 권력의 주변부에 머물 것처럼 보였던 주인공 역시, 자신에게 몰려오는 표심에 스스로 외면하던 욕망 사이에서 결국 눈이 멀어갈 즈음, 영화는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들을 향해 격렬하게 펼쳐진다.
눈과 귀가 열린 사람들
재미 신학자 이정용 박사는 자전적인 책 <마지널리티>에서, 주변화된 사람들의 역동성에 관해 말한 바 있다. 중심은 결코 알아차릴 수 없는 균열과, 그곳에서 벌어지는 자기파괴적인 경쟁. 주변화된 사람들의 눈에 포착되는 중심의 모순과 위선은 상상을 초월한다. 카불에서 온 추기경이 갑작스레 등장한 식탁에서, 식사 기도를 부탁받은 그가 익숙한 라틴어 기도 뒤에 , 스페인어로 뜻밖의 기도를 덧붙인다. 수녀가 굳게 감고 있던 눈을 번쩍 뜨게 만든 바로 그 장면. ‘확신을 의심하라.’ 진리는 올곧은 것이지만 동시에 부드럽기에 휘어질 수 있다. 원칙과 전통, 의심과 회의 사이에 놓인 진리는, 그동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던 사람들의 입을 통해 드러난다.
사람들, IMAGO DEI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으로 창조되었다. 창세기에서 천명한 이 엄숙한 명제를 어느 그리스도인이 감히 부정하겠는가. 하지만 당신이 거룩하게 여기는 상대가, 당신이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면, 그때도 우리는 그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영화는 모든 갈등이 해소되었다고 느껴지는 마지막 순간에 이르러, 가장 깊숙이 감춰졌던 질문 하나를 관객에게 던지며 끝을 맺는다. 신학자 무사 두베(Musa Dube)는, 아프리카 교회에서 터부시되는 HIV에 관한 캠페인을 전개하며 “공동체의 한 지체가 감염되어 아프다면, 하나님도 아프시다”는 도발적인 신학적 선언으로 우리들의 무감각을 일깨운 바 있다.
종교가 사라지는 시대, 종교성이 오히려 조롱받는 시대. 그 속에서 우리의 자리는 어디여야 하는가. 아니, 우리는 지금 어디에 서 있는가.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 문을 열고 달려나가던 소녀들의 청량한 웃음소리처럼, 우리는 굳게 닫힌 문들을 선한 힘으로 열어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교황에서 주어지는, 진짜 ‘천국의 열쇠’아닐까. 202504 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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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를 뉴욕행 비행기 안에서 보고 난 뒤, 애정하는 팟캐스트 <여자둘이 토크하고 있습니다>에 이런 감상평이 담긴 아래의 이메일을 보냈다. 이메일을 소개하던, 황선우 작가는 “톡토로는 어디에나 있죠. 교회 안에도 있습니다.”라는 말로 포문을 열었고, 이하나 작가는 마지막에 “하나님 할머니”라는 아주 마음에 드는 표현으로 마무리해 주었다. 공명하는 일, 이 땅의 문제에서 고개 돌리지 않는 일. 참 하나님이면서 동시에 참 사람이었던 예수님처럼 촘촘하게 일상 속 발걸음을 다시 내딛는다.
https://podcasts.apple.com/kr/podcast/여둘톡/id1617974770?i=1000699517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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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독일에 살고 있는 목재토로(목사 재이의 줄임말🤗)입니다. 원래 유럽 톡토로 유니버스에서는 목토로라고 자기 소개를 했는데, 생각해보니 늦깎이 톡토로 세계에 들어온 제가 모르는 (한국의) 목토로(예를 들어, 목동에 사시거나 나무(목)를 좋아하시는 톡토로)가 분명히 있을 것 같다는 확신(?)이 들어서요. 저는 독일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있는, 개신교 목사입니다.
오늘 이렇게 메일을 쓰는 이유는, 지난 주에 추천해주신 콘클라베를 지금 막 비행기 안에서 보고 밀려드는 여운 탓에 아무 것도 할 수 없어서 입니다. 그 덕분에 처음으로 ㅡ 드디어!! ㅡ 언니들께 팬레터와도 같은 이메일을 보낼 수 있게 되었네요! 오스트리아 항공 만만세!! 찡긋. (음식점, 여둘 애드 소개해 주실 때마다 귀국일만 손꼽아 기다린다는ㅎ 참, 선우 언니가 소개해준 디오디너리 세럼들은 저도 넘 잘 쓰고 있어요!!)
싱글 여성 목회자로서, 카톨릭 교회의 수녀님들만큼은 아니지만 종교와 교회라는 제도가 가져오는 무시무시한 무게와 갑갑함을 느끼는 경우가 많은데요. 다행히(!) 제가 속한 교단에서 목사 안수는 받았지만 여전히 많은 교단에서 여성은 아무리 신학을 공부해도, 안수조차 이뤄지지 않고 있어요. 하지만 안수를 받았다고 해서 차별이 없을까요. 콘클라베에서 나오는 문제들이 여전히 산재합니다. 국적에 대한 차별, 학벌에 따른 서열 다툼, 돌봄과 양육으로 한정되는 일자리. 토크니즘(Tokenism)으로 여겨지는 들러리 세우기. 한국의 개신교가 오늘날 종교개혁의 대상이라고 얘기할만큼, 기독교인이라고 말하는 일은 물론 목사라고 말하는 일도 참으로 힘겨운 요즘입니다. 영화 콘클라베가 제 안에서 공명을 일으킨 이유도, 어쩌면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희망은 결국 내 옆에 있는 사람 안에서 찾을 수 있다는 메시지 때문인지 모르겠어요. 금단의 벽을 허무는 이야기가 2025년에도 여전히 필요하다는 것. 그리고 그 벽은 분명히 무너질 것이라는 ‘믿음’이, 어쩌면 오늘의 우리를 지탱하는 힘이지 싶습니다. 마지막 장면에서 어린 소녀들이 열린 문으로 달려 나오던 것처럼요.
저는 독일 학생들에게 아시아 아프리카 여성 신학을 가르치고 있는데요. 전세계 멋진 언니들의 신학을 가르치면서, 금단의 벽에 조금씩 균열을 만드는 중입니다. 콘클라베를 보면서, 제가 좋아하는 현경 교수님의 “다시 태양이 되기 위하여(The struggle to be sun again)”의 한 대목을 나누며 첫 메일을 살포시 닫아봅니다. “원래 여자는 태양이었다. 그는 참 인간이었다. 그런데 이제 여자는 달이 되었다. 그는 다른 것에 기대서 살며 다른 빛을 반사해서 빛을 낼 뿐이다. 그의 얼굴은 창백한 병색이다. 이제 우리는 감추어진 태양을 다시 찾아야 한다 .“숨겨진 우리 태양을 밝히고 본래 우리의 선물을 다시 찾자!“ 이것은 우리 마음 속에 끝없이 울리는 외침이다 이것은 누를 길 없는 억누를 수 없는 우리의 욕구이다. 이것은 우리의 마지막 완전한 그리고 유일한 본능이다. 이를 통해 우리의 온갖 찢겨졌던 본능들이 하나가 된다.(103)“
시간 들여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매주 울림이 큰 목소리를 나눠주셔서 더 고맙습니다.
p.s. 두 분이 항상 영육간에 (업계 용어가 나왔…🤗) 강온하시길 여둘톡 들을 때마다 기도합니다. 다시 한번, 진심으로 감사드려요! 🙂
2025년 3월 9일,
미국행 비행기 안에서 횔활 타오르는마음으로, 목재토로 드림
(비행기 안에서 쓰고 뉴욕 공항 내리자마자 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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