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득한 시간을 되돌아 보고 | “저는 한국에 뼈를 묻을 생각입니다.” 느닷없이 했던 오래된 말이, 불현듯 돌아오는 순간들이 있었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처음으로 이력서를 써냈던, 공익인권변호사 그룹 ‘공감’의 면접을 보던 자리였어요. 영어를 전공했으니 영미권의 로스쿨을 가지 왜 급여도 주지않는 변호사 사무실에서 인턴을 하느냐는 물음에 대한 답이었습니다. 이십대의 치기 어린 마음에, 소속감에 대한 갈망, 붙고 싶은 욕심까지 더해져 결기어린 말이 순간적으로 터져 나온 셈이었지요. 면접을 보던 변호사님들 얼굴에 순간 반짝하고 스파크가 일던 모습도 기억납니다. 외항선 기관장을 그만두고 신학을 공부하겠다던 아버지에게, 신문배달이라도 해서 뒷바라지 하겠다던 열살짜리 꼬마가 그렇게 자란 셈이었지요. 그렇게 이 엄혹한 비상시절에, 결코 낡을 줄 모르는 저의 오래된 말들을 마주합니다.
모든게 선명하지 않더라도 | 세계 모퉁이 구석구석을 다녀도, 우리 나라라고 부를 수 있는 유일무이한 동아시아 끝의 작은 돌기 같은 나라. 아무리 수많은 언어를 새롭게 배워도, 심연에서 당연하게 떠오르는 가나다라마바사. 쿰쿰한 묵은지와 딱딱한 건나물, 덤으로 얹어주는 시장 인심과 활기 넘치는 거리. 따뜻한 온기에 둘러 싸이는 일상에도, 어이없는 폭력이 함부로 들이닥치는 권위주의. 한국이라는 단어를 절대 말하지 말고 설명하라고 해도 밤새워 말할 수 있을, 나의 모국. 화면 속에 담기지 않는 일상의 공기들을 상상하느라, 신열을 앓듯 한 주 내내 오히려 더 화면 앞에 꼼짝없이 포박당한 기분이었습니다.
소중했던 추억이 기억들을 지워버린 나의 지난 날들이 | 권사님을 처음 만난 건, 동생의 병문안을 갔을 때였어요. 흰머리가 성성한 어르신이 염증에 좋다는 잘바이(Salbei)차를 동생에게 권하고 계셨습니다. 그 옆에는 한 눈에 보기에도 낡은 청진기와 수은 혈압 측정기. 은퇴한 간호사라는 호칭도 무색하게, 절박한 마음으로 권사님의 한마디 한마디에 집중했던, 고마운 마음 뿐이었던 게 벌써 4년 전이었습니다. 유난히 말수가 적으셔서 꽤 오랫동안 어렵게 느껴졌던 권사님. 동생 집에 불이 났던 날, 함께 주방에서 그을음을 닦아내며 한 뼘. 다함께 코블렌츠 요새에 올라갔다가 갑자기 당이 떨어지셔서 인슐린을 주사하시던 모습에, 설탕을 건네며 두 뼘. 붓글씨 전시회에 초대해 주셔서 작은 화분을 들고 찾아가며 세 뼘. 저도 모르는 사이에 이렇게나 가까워졌던 사이였네요. 조각처럼 흩어져 있는 인터뷰 대상자들의 이야기에 실처럼 꿰어낼 무언가가 필요했습니다. 상반되는 이야기들이 너무 많았거든요. 몇 주전에 미리 뵙기로 잡아두었던 일정. 그 사이에 비상계엄이 있었습니다. 남편의 장례를 치른 이듬해에 교회를 옮기셨다고 했습니다. 젊은 시절 진보적인 교회에서 회계를 맡을만큼 열심이었는데, 날카롭고 예리하게 서로를 향해 삿대질하던 이민 한인 교회의 이면에 이골이 났기 때문이었습니다. 보수적인 지금 교회에서는 한국이 이런 상황인데도 정치 얘기를 한마디도 못해서 답답히다고, 목사인 저에게 그 둘의 화해가 왜 그렇게 어려운지 묻습니다. 우리 둘 다 답이 없다는 걸 너무나 잘 알면서도, 답이 있다고 믿고 싶은 마음으로, 오래전 고 이승만 목사님께서 해주신 나무 이야기를 했어요. 흑인 인권 운동가인 마틴 루터킹 목사에게 인권에 대해 배우고, 미주 한인 운동사에 깊숙히 관여하신 분인데 아무 것도 모르는 제게 본인들의 실패를 얘기했습니다. 열매를 쫓느라 뿌리를 돌보지 못했다고. 다음 세대가 교회를 떠나는 걸 몰랐다고. 모든 것을 시작했던 지점인 말씀이나 교회와 같은 기반을 너무 무시했다고. 운전대를 잡고 있던 권사님의 눈에 작은 빛이 어리는 순간을 보았습니다. 직접 만들어서 건네 주신 슈톨렌(Stollen)과 대림환(Adventskranz)을 방금 막 태어난 아이처럼 소중하게 품고 있다가요.
오늘
세계의 염원은 평화이며
우리의 염원은 평화적 민족통일입니다
이런 염원은 주님이 오실때만
가능하겠기에
우리는 성탄절을 기다립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오신 주님이 아니라
오실 주님을 기다립니다
1982년 성탄절을 맞아
안 병 무
또 다른 내일을 묻는다* | 박사 논문의 틀거리를 잡던 2021년 첫 해 그 겨울만 해도, 제 논문의 방향이 이렇게 흘러가리라고 더구나 40년 전 상황과 비슷한 일이 실제로 일어날 것이라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일주일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냉동고에서 막 나온 것처럼 얼얼한 마음 그대로인걸요. 내년 2월에 독일에서 만나기로 한 영남신대의 교수님과 통화 말미에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정 목사, 그래도 정말 다행인건 동성로에 제자들이 나가요. 우리 세대는 실패했으니 나한테는 배우지 말라고 말했는데, 얼마나 기특한 일인지.” 사실 저도 오늘 아침에 강의를 하면서, 인종차별주의 얘기를 하다가 시리아 상황이 바뀌자마자 난민 비자 절차를 보류했다는 밤사이 뉴스에 분개하는 독일 학생들을 보면서 내일은 다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독일인이라는 사실이 한번도 자랑스러운 적 없었지만, 2014년에 난민을 대거 수용하면서 기차 역에서 환영하는 사진을 보고, 처음으로 뿌듯했었다는 얘기도 덧붙여서 제게 설명해 주었습니다. 슈파이어 문서고에서, 올해 마지막 방문을 마치며 이른 성탄 인사를 건네자 담당부서 선생님이 크리스마스 인사와 함께 작은 종이별을 건넵니다. 단 네 장의 종이끈으로 만들 수 있다는, 독일의 한 교육학자가 고안했다는 Fröbelstern(프뢰벨 별). 납작한 종이에서, 볼록이는 별을 품고 꺼낸다는 마음으로. 그 어느 때보다 납작한 마음으로 연말을 맞게 된 우리 모두에게, 내일의 별들이 건네는 평화의 온기를 사랑하는 나의 조국에게 보내며. 따뜻하게, 부디 우리 모두 간절히 바라는 내일로. 20241210 재이.
*J Rabbit 곡, <내일을 묻는다>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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