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묻는 안부처럼

코너를 돌자 빠르게 달려오던 말과 눈이 마주쳤습니다. 산책길에 지푸라기처럼 흩어진 말똥들을 피하면서 걷느라 투덜거리던 참이었는데요. 모처럼의 햇살이 반가워 독서모임 전에 짧은 산책을 하려고 나선 길이었어요. ‘고삐풀린 망아지’라는 표현이 떠오를만큼 자유분방한 모습. 하필 휴대폰도 집에 두고 나섰는데! 꼭 이런 날, 이렇게 신기한 순간이 마법처럼 찾아옵니다. 말도 놀란 눈치였어요. 서로 마주보고 숨을 고르던 그때, 금빛 갈기를 휘날리며 제 눈 앞으로 걸어오는 말의 당당함에 흠칫 놀라 물러섰습니다. 말의 뒷발질이 무섭다는 얘기가 갑자기 생각이 났거든요. “괜찮아, 너도 가고 나도 내 길을 갈게.” 독일태생의 말은 알아들을 수도 없는 한국말로 안심시키고는 살짝 곁길로 방향을 틀었습니다. 이내 말이 가던 길을 달리는 뒷모습을 쳐다보는데, 그제서야 고삐를 들고 황망하게 달려오는 주인과 만났습니다. 당황한 저를 보면서 보내던 미안한 눈빛만큼이나 얼른 말을 따라잡아야 한다는 의무감이 느껴지던 속력의 걸음. 서둘러 달려가는 그녀를 보며, 조금 전 제가 마주친 말의 눈망울을 더 오래 바라볼 걸 그랬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말에게는 어쩌면 가장 즐거웠던 일탈의 순간을 제가 목격한 셈이니까요. 지금 이렇게 쓰면서, 내년에는 동네 승마장을 한번 가봐야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살아있는 존재와 가까이에서 호흡하며 무언가를 함께한다는 것은, 한강(Han Kang)의 말처럼, ‘살고자 함’을 지향하는 생명의 따뜻함을 손내밀어 만지는 일. 뜨거운 군밤을 호호 불며 까서 상대에게 건네는 일. 새해에는, 다시 그렇게 생명의 자리로 한걸음 나아가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성탄을 한 주 앞둔 독일의 거리들은 막바지 크리스마스 마켓과 선물꾸러미를 챙겨서 가족들을 만나러 가는 사람들로 붐빕니다. 언제부터였나 기억도 나지 않는데, 매번 지도 교수님과 아내인 도로테아 교수님께 성탄절 선물을 받기 시작했어요. 교수님은 주로 책이나 그림책을 선물하시곤 했습니다. 작년에는 서남동 교수님의 ‘한의 사제’와 그 전년에는 테오 순더마이어 교수님의 책. 지난 주에 너무 무리를 했던지 감기에 걸려서 며칠 헤매다가 어제 모처럼 학교에 갔는데, 사무실 책상 위에 교수님과 도로테아 교수님 선물과 메시지가 있었습니다. 올해는 교수님 선물이 프랑스어로 적힌 와인 포장박스에 담겨 있었네요. 교수님이 본인 선물은 성탄절 당일에 열어보라고 하셨는데, 제가 제네바에 간다는 얘기를 들으시고는 깨질 수 있으니 들고가지 말라는 신신당부. 하지 말라면 더 하고 싶은 마음, 아시죠? 😝 오늘 학교에 가서 미리 몰래 열어보니 예쁜 꽃 그림이 그려진 소박한 찻잔 세트네요. 도로테아 교수님은 본인이 직접 따서 말린 허브와 자수가 놓여진 작은 테이블보. 독일에서 배운 것 중에 제가 가장 아끼는 하나는, 이렇게 성탄절에 자신이 만들거나 모은 소박하고 사소한 것들을 정성스럽게 나누는 마음입니다. 선물에 마음을 담는다는 것은, 단순히 상대의 필요를 채우는 것을 넘어 내가 당신을 생각하며 시간을 보냈음을 증명하는 일이라는 생각을 해요. 어느새 씀씀이가 커진 한국에서는 보기 어려워진 소박함이면서, 독일의 더딘 디지털화가 가져다주는 의외의 기쁨이기도 합니다. 느림보 학생인 저를 잘 견뎌주셔서 고맙다는 인사를 꾹꾹 눌러담은 엽서에, 작은 복주머니에 한국 홍삼차를 넣어 드렸어요.

🎄2024 성탄절, 선물의 기억 🎁
@ Wallstrasse 7a, Mainz

청년들과의 작별인사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2년에 가까운 시간, 제게는 너무나 간절했던 공동체가 이제는 든든히 세워져서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걸음을 정리합니다. 사임 소식과 이런 저런 연말 일정들을 조율하면서, 이 또한 수많은 안부 인사와 다르지 않음을 생각해요. 계속 청년부 사역자가 오기를 기도하던 중에, 제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왔다는 말에 얼마나 황송했던지요. 목회자이기 전에, 저도 한 명의 청년으로 동시대를 살아가는 기쁨을 다시금 깨달을 수 있었던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청년들한테 구박을 받기도 하고, 하소연하는 청년들의 한숨 담긴 전화를 붙들고 기도해 주기도 하고, 혼자 가기 어려운 곳을 함께 가고, 막연하게 어려웠던 일들을 계획하면서 오롯이 청년 재이로 살았습니다. 저를 처음 본 권사님이 하셨던 말씀을 아직도 잊지 못합니다. 보자마자 다짜고짜 결혼 여부를 물으시기에, 미혼이라고 말씀드렸더니 말이 마치기가 무섭게 “잘 하셨어요!!” 하셨거든요. 그 때 제가 어떤 마음으로 다시 독일에, 한인 교회에 왔는지를, 그리고 그 날이 어떤 날이었는지를 하나님이 정확하게 아시고 가장 명확한 말로 위로하셨다는 것을 계시처럼 받았습니다. 사임과 함께 선배에게 본의 아니게 사례비 얘기를 할 수 밖에 없었지만 저를 위해서가 아니라, 액수의 여부와 상관없이 이제 막 사역을 시작한 제 후배 전도사에게만큼은 제대로 된 사례비로 인상되기를 바란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연일 미뤄지는 사례비를 보면서, 제가 교회 재정의 부담을 덜어야겠다고 생각했다면 그것도 하나님이 오지랍이라고 뭐라고 하실까요. 때로는 이기심을 발휘하는 것이 부족한 지혜를 채우는 방법이 되기도 합니다. 당장 어디로 휘발되는 존재가 아니라 언제라도 찾아올 대나무숲이 되어주겠다는 약속을 했습니다. 작년 마지막 날에 청년들과 함께 썼던 작은 엽서에, 이렇게 쓰여있네요. “희경아, 2024년도 애쓰고 힘차게 살았던 네 모습이 이미 충분하고 자랑스러워♥️ 하나님 안에서 더욱 깊은 믿음의 지경으로 넓어지고 넓어졌기를 기도해. 어떤 모습이든 충분히 잘했고, 잘하고 있으니 힘내서 더 행복하자.” Ich wünche Ihnen eine gesegnete Advents – und Weihnachtszeit! 20241220 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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