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시나 오늘도 기차는 늦네요. 전광판의 화면들이 일제히 붉은 깜빡이로 물이 듭니다. 새벽같이 일어나 일정을 서두른 보람도 없이, 꽃샘 추위에 가볍게 입고 나온 청바지가 야속하게 말이죠. 발을 동동거리며 전광판만 바라보던 사람이 이내 깊은 한숨을 쉬고는 자리를 뜹니다. 하필 버스도 파업인 오늘같은 날, 그나마 연결편 사이의 환승 시간이 길어서 다행이다 싶습니다. 이제는 긴 환승 시간이나 취소나 지연되는 기차 사이에 어디에서 무엇을 하며 시간을 보낼지 미리 준비하는 게 당연해졌습니다. 뜨개질을 배운 것도 그 덕분이고, 가방에 늘 얇은 책 한권씩 챙기는 것도 그 덕분이니까요. 독일어를 진득하게 배워야겠다고 결심하게 만든 것도 지연과 취소가 고질병인 도이치반(DB) 덕분이네요.

4년에 한번 돌아온다는 윤년 윤달, 열흘 전 생일을 맞은 친구를 만나러 일곱시간의 기찻길에 오릅니다. 생각해보면 제게 유럽인의 삶을 가장 적나라하고도 가까이에서 보여준 친구입니다. 크리스마스 마켓의 훈제연어나 크리스마스 트리, 그리고 라끌렛 요리. 일취월장한 친구의 한국어에 비해 저의 독일어는 비루할 따름이지만 우리에게는 영어가 있으니까요. 갑작스레 모든 것이 취소되었던 작년, 모니터 앞에서 울어버려서 저를 당혹시켰던 제 가장 오랜 친구 대신 이 친구는 담담하게 저의 변화를 인정하고 기꺼이 취소된 일정을 받아주었습니다.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받아들여지지 못했다는 실망감만큼이나 의외의 사람들에게서 받는 이해와 용납은 힘이 컸습니다. 덕분에 관계의 깊이나 정도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아물어야 할 상처들을 봅니다. 지연 배상처럼 제 삶에서 상처입은 영혼들을 위한 기도가 멈추지 않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처음 장거리 기차를 탈 때는 빈 자리 찾는 것도 쉽지 않았습니다. 낯선 언어 탓도 있었지만 진행 방향이나 검표 방식, 그 무엇하나 익숙하지 않았으니까요. 이제는 기차 방향에 맞춰 어느 쪽에 앉아야 더 좋은 풍경을 마주할지 알아차리는 정도가 되었습니다. 작년 한 해 신나게 이용했던 Silber Status도 한 몫 했습니다. 차창 밖에서 조금씩 해가 하늘을 붉게 물들입니다. 첫 차를 타는 사람들은 모두 알겠지요, 새벽에 우는 새들의 목소리가 더 청아하다는 사실 말입니다. 추운 날씨에 늦어지는 다음 열차를 확인하고는 역 근처 빵집에서 작은 카푸치노 한잔과 초코 크로와상, 호박씨 잔뜩 박힌 브레첼을 삽니다. 탄수화물이라고 타박해도 어쩔 수가 없네요.

늦어진다고 도착할 방도가 없으리라 미리 예단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버스가 없으면, 자전거로, 자전거가 없으면 튼튼한 다리로 걸을 수 있는 길은 어디에나 있으니까요. 각자의 방법으로 닿게 되는 그 자리가 나의 길이, 우리의 길이 될 테니 말입니다. 친구가 점심을 함께할 식당을 찾아보겠다고 하네요. 잠시 눈을 붙여야겠습니다. 20240229 재이.

Wir schämen uns für alle, die gegen uns.

우리는 우리를 반대하는 모든 사람들이 부끄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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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e Comment

  1. 단정한 공간에 멋진 글들이 가득하네요.
    위로가 되고, 감동을 주는 ‘글’의 사역에 감사드립니다.
    아련한 기억만큼 개인적인 울림도 새삼스럽습니다.
    강건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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