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 크리넥스가 있다면 독일에는 템포(Tempo)라는 이름의 국민 휴지가 있는데요. 처음 독일에 와서는 봄이 되면 사방에서 템포를 꺼내 코를 푸는 풍경이 참으로 낯설게 느껴졌습니다. 하지만 이 봄이 가까운 계절에 되도 않는 감기에 걸려버린 저도 장 보러 나가는 주머니에 슬그머니 템포를 넣고, 길 위에서 몇 번이나 코를 풉니다. 밀려있던 양말뜨기의 뒤꿈치를 뜨고 파친코 2권을 읽으며 어제는 하루종일 집 밖으로는 꼼짝을 못할 정도로 앓았습니다. 다음주 온라인 컨퍼런스 비디오도 녹화해야 하고, 주일에 돌아오는 설교도 다듬어야 하는데 말입니다.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봄맞이 연례행사라고 여길 밖에요. 그래도 함부르크의 카스파르 다비드 프리드리히 특별전은 정말정말정말 좋았습니다. 애정하는 화가가 한 명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고생을 감수해야 할 마음이 생기니 말입니다. 그냥 하룻밤이다 싶어서 역 근처 저렴한 호스텔에 묵었는데 이층침대 위에서 코고는 소리, 저쪽 침대에서 핸드폰 불빛에 밤새 한숨도 자지 못했습니다. 그 상태로 수많은 사람들이 붐비던 특별전에 갔으니 감기에 걸리지 않았으면 오히려 이상할 뻔 했습니다. 지난 여름 베를린 국립미술관에서 보았던, 해변의 수도사(Der Mönch am Meer)를 여기서 다시 보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전혀 기대하지 않았다가 진귀한 보물을 발견한 기분이 이런 것일까요. 엷은 색상의 유성 물감을 작은 점 하나처럼 찍어 수도사의 맨발을 그려낸 방식에 탄복을 했습니다. 어둑어둑한 밤 같았지만 분명 하늘과 맞닿은 묵묵한 바다였지요. 수많은 바다를 그려낸 프리드리히의 작품을 보면서, 오랫동안 잊고 지냈지만 새삼 제가 바닷가 태생이라는 게 생각이 났습니다. 깊이와 너비를 알수없는 심연과도 같은 바다 앞에서 막막하지만 평온함을 느끼는 모순같은 마음을 이해하니 말입니다.
In a comment on the painting, Friedrich expressed scepticism regarding the figure on the shore. He characterised him as a person who presumes to try to understand and unravel mysteries in order to master all he sees. But the ‘ineffable beyond’ inevitably eludes such ‘vain conceit’. For Friedrich, the picture is therefore about ‘what can only be a divine presentatiments’, something that is ‘seen and recognised only through faith’
Monk By The Sea 1808-1810
프리드리히의 그림 중 가장 유명한 안개 바다의 방랑자(Der Wanderer über dem Nebelmeer) 앞에는 역시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연신 사진을 찍어대는 관광객들 속에서 저는 잠시 숨을 고르고 가이드 투어 중인 사람들이 지나가길 기다렸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쿨한 뒷 모습의 방랑자에게 집중하고 있는데, 저는 그가 밟고 선 바위. 그리고 그 위에 작게 그려낸 잡초같은 작은 풀들이 눈에 들어 왔습니다. 클로즈업을 해서 사진을 찍고 있으니 제 뒤에 계시던 할아버지가 저를 보고 씨익 웃습니다. 어떻게 그걸 봤냐는 표정으로 말이죠. 작은 것들이 자꾸 눈에 들어옵니다. 그게 흠이기도 하고, 그게 업이기도 합니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알프스의 산을 그려냈다거나 빙하가 녹는 장면을 포착한 그림. 수도원의 폐허에 남겨진 십자가와 같은 장면들을 그려낸 프리드리히는 유독 내면과 성찰의 중요성을 이야기한 화가이기도 합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눈, 표면을 넘어 서서 본질을 꿰뚫는 감각. 신학자로서 부러우면서도 닮고 싶은 화가의 매력입니다. 기념품샵에 들러 이런 저런 엽서를 사서 나오던 길에, 해변의 수도사 포스트잇을 발견하고 다시 되돌아 가서 집어 왔습니다. 이 포스트잇에는 따뜻하고 즐거운 일들이, 하늘의 말들이 담기길 기대해 봅니다. 20240305 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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