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크인 시간을 두시간 남겨놓고 서두르는데, 그녀의 어머니가 다가와 인사를 건넵니다. 오늘 설교 감사하다며 작년 한해 당신의 딸을 잘 돌보아주어 고맙다는 인사를 거듭합니다. 잊고 있었어요. 제가 격의없이 베풀었던 지나친 호의들은 어디로 가는 걸까요. 밥도 해주시고, 방도 빌려주시고, 여러가지로 힘들었던 딸에게 큰 힘이 되어주셨다는 말을 합니다. 작년 제 얘기인데도 아득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올해 제가 그녀와의 사이에 세운 바운더리 때문이 크겠지요. 그녀가 잘 하고 있다고 걱정하지 마시라고 살짝 어머니의 어깨를 두드리는데 갑자기 들썽입니다. 눈시울이 붉어지며 휴지를 꺼내시네요. 맙소사, 저의 나쁜 재주가 또 발휘되는 순간입니다. 한번 안아드리고 서둘러 짐을 챙겨 공항으로 오는데, 동그란 안경과 그 사이에서 반짝이던 눈물이 내내 마음에 머무릅니다. 고단했던 그녀의 삶 역시, 딸을 통해 들었기 때문이겠지요.
아버지의 심장마비와 수술로 출국이 늦어졌던 베트남 친구. 처음 보는 순간 알아차렸죠. 조그만 체구에 영어 발음도 알아듣기 어렵지만 꽤나 단단한 마음결을 지녔다는 사실을요. 베트남에서 한아름 챙겨온 말린 과일과 커피. 가까워진 뒤에도 매번 고맙다는 인사를 잊지 않는 태도. 전혀 만나보지도 않은 사람과 낯선 여행지에서 방을 공유한다는 건 어려운 결정이었는데, 제가 늦게 온다고 호텔에서 나오지 않으려 했다는 얘기를 듣고는 정말 고마워졌어요. 일행 중에 어깨 근육이 뭉친 사람이 얘기를 하니,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마사지를 해 줍니다. 자격증까지 있다는 얘기에 오늘 아침 식사를 하며 물었어요. 이런 저런 적용법부터 언제 얼마나 배웠는지를 묻다가 마지막 질문이, 그런 치료법을 배운 이유였는데 늘 밝게 대답하기만 하던 그녀가 갑자기 말도 없이 울어버리네요. 먹고 있던 홍차를 내려놓고 냅킨을 챙겨 서둘러 그녀에게 건넵니다. 누군가의 통점을 건드리는 일이 이렇게 느닷없다니요. 설명을 듣지 않아도 그녀의 눈물로 이미 모든 게 선명합니다.
며칠을 사람들 속에 머물다보니 혼자 있는 시간이 그리웠나 봅니다. 챙겨야 할 일이나 신경써줘야 할 사람들도 어쩌다보니 다 떼어놓고 비엔날레에 가장 늦게까지 남아있게 되었네요. 낯선 이들 틈에 끼어 바포레토를 타고 다시 역으로 가는 길입니다. 넘실거리는 파도에 연신 흔들거리는 선체. 세상에서 선원의 인구 밀집도가 가장 높을 것 같은 지역. 이탈리아도 처음인데, 베니스에 비엔날레까지 발바닥에 불이 나도록 걷고 있어요. 체력이 많이 좋아졌다는 얘기이기도 합니다. 마음과 몸 모두의 체력 말입니다. 수많은 정보가 쏟아지는데 베네치아관의 한 유화 그림 앞에 한참을 앉아 있었어요. 영원과 찰나의 그 어느 사이에 있을 법한 그림. “발견(il ritrovamento)”이라는 제목의 큰 작품 옆에 “모래 위에서(Sulla sabbia)”라는 작은 작품이 연작처럼 놓여 있는 방에서, 처음으로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역에 도착할쯤 다시 일행들과 연락이 닿았습니다. 숙소가 있는 파도바에서 저녁을 먹으려 했는데, 같이 갈 수 있을 것 같아 기차 안에서 먹을 간단한 음식을 찾아봅니다. 마감이 머지않아 반값세일이 한창인 빵집에서 카프리제 포카치아를 듭니다. 선한 눈매의 청년이 뭐라고 하는데 모르겠어요. 데워줄까 묻는 거 같아서 Grazie 했습니다. 제 마음까지 환해지게 소리내어 웃네요. 일행들을 위한 표를 사고 플랫폼 18번에 미리 가서 문을 잡고 섭니다. 혹시라도 늦을까봐 기차를 잡아 놓으려는 계책이었지요. 출발시간을 5분 정도 남겨놓고 저 멀리서 뛰어오는 세 명의 얼굴이 보입니다. 호들갑을 떨며 우리가 해냈다고 소리쳐 봅니다. 그런 작은 배려와 우연의 순간들이 만나 우리는 또다시 사랑을 배우는 것이겠지요. 비가 그치고 보이는 하늘과 구름이 너무 예뻐 저도 살짝 눈물이 날 것 같네요. 생각해보면 이 나쁜 재주를 가르쳐준 게, 하늘에 계신 당신이었군요. 20240521 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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