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egenz, Austria
Erster Akt : 추위가 채 가시지 않았던 올해 초봄의 어느 날. 방금 제 입안을 샅샅이 들여다본 치과 선생님과 동네 카페에 앉아 도란도란 얘기하던 중이었어요. 몇 주 전, 마인츠 대극장에서 본 뮤지컬 <Der Kleine Horror-Laden(흡혈 식물 대소동)>의 등장인물, 치과 의사에 관한 에피소드를 전했습니다. 사람들의 피를 먹고 자라는 흡혈 식물에 관한 공연. 하얀 천에 피 대신 토마토케첩을 신나게 뿌리면서 우리가 느끼는 치과에 대한 공포를 유쾌하게 재해석했던 게 인상적이었거든요. 낮은 컨버스 운동화를 신고, 화장기 없는 얼굴로, 도서관의 책장 사이 노트북 앞에 앉아 꼬부랑 글자들과 씨름하는 유학생의 삶. 학생들도 비용 걱정 없이 다양한 문화를 쉽게 접할 수 있도록, 극장의 문을 낮추고 활짝 열어놓은 도시의 배려는 일종의 품위 유지 혜택과도 같았습니다. 온종일 책상 앞에서 투덕거리다가 저녁이 되면 신데렐라처럼 구두를 신고, 나풀거리는 원피스를 입고, 립스틱을 바르고, 한 달에 두세 번씩 꼬박꼬박 대극장에 갔습니다. 뉴질랜드 살이를 마치고 돌아오던 귀국행 비행기에서, 반년 만에 비탈리의 샤콘느를 듣다가 울어버렸던 날처럼 절실한 마음으로. 조금씩 그리고 천천히 제가 좋아하던 것들을 되짚어 가는 여행이었습니다. 평소에는 볼 수 없던 정장 차림의 멋쟁이 노부부들을 극장에서 참 많이 만났습니다. ‘삶을 향유한다’는 의미를 그제야 배우게 되었지요. ‘향유하는 삶’을 동경하고, 비난하고, 결국 헐뜯으면서 외면하는 사람들은 결코 경험할 수 없는 초격차였어요. 마주 앉은 선생님이 얘기 끝에, 보덴제(Bodensee)의 한 작은 마을 브레겐츠에 있는 야외극장 사진을 찾아서 보여 주셨어요. 올해 대학에 들어가는 조카와 함께 보기 위해, 작년에 티켓 사이트가 오픈하자마자 예약했다는 오페라 <Der Freischütz(마탄의 사수)>. 유럽의 3대 오페라 축제 중의 하나라고 했습니다. 이방인으로 살면서, 놓치지 말아야 하는 문화생활에 대한 공감대가 급격히 올라가는 순간이었지요. 그때만 해도 제가 실제로 그 오페라를 보게 될 거라는 생각은 전혀 못 했습니다. 막연히 언젠가 한 번쯤은 가야겠다, 저장해두기만 했거든요. 수능을 망치고 입시를 실패한 조카님 덕분에, 어부지리로 제가 그 귀한 좌석에 앉았습니다.
Zweiter Akt : 충격적이거나 때로는 가학적으로까지 느껴지는 장면들을 가감 없이 사용하는 독일의 공연 문화. 작년 여름, 마인츠 박물관 야외극장에서 보았던 연극 <Shakespeare in Love(셰익스피어 인 러브)>. 개인적으로 가장 충격적이었던 장면은, 한 남자 배우가 진짜 알몸으로 등장했던 순간이었습니다. 얼굴이 빨개질 만큼 당황한 저를 빼고 모든 독일 사람이 신나게 웃어넘기는 게 더 놀라웠습니다. 정면이 아니라 다행이긴(!) 했는데, 당시의 보수적인 영국 연극계를 풍자하는 뜻에서 남자 배우가 거세당한 것처럼 다리를 모으고 여배우 흉내를 냈습니다. 외설스럽거나 선정적인 맥락으로 인간의 몸을 바라보지 않고, 지극히 일상적인 삶의 영역으로 대하는 자세. 오페라 <Die Passergierin(승객)>에서는 아우슈비츠의 상황을 보여주며, 남녀의 알몸들이 그대로 측면으로 공개되기도 했습니다. 홀로코스트라는 역사의 무게를 결코 가볍게 여기지 않는, 독일의 지독한 실존주의를 책이 아니라 극장에서 만났던 셈입니다. 평상시에는 몇 센트 차이에도 예민하지만, 여름휴가와 가족 모임에서는 아낌없이 지갑을 여는 태도. 해 질 녘, 브레겐츠 호반 무대를 빽빽하게 메운 사람들을 보며 경이로움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그 무대를 낮에도 모든 방문객에게 오픈하는 여유에 또 한 번 놀랐어요. 수십만 원을 호가하는 오페라의 공연 무대가, 그 대가를 지불하는 소수의 사람에게만 공유되는 것이 아니라는 게 얼마나 큰 발상의 전환인지요. 프리미어가 끝나고 며칠 뒤 이미 오스트리아의 한 방송국에서는 이미 올해 공연의 중계를 마쳤습니다. 미리 절반쯤 보고 왔음에도 현장감은 완전히 달랐습니다. 오페라라기보다는 한 편의 대형 뮤지컬 공연처럼 두 시간 내내 쉬는 시간 없이, 빈틈없이 이어지는 레파토리는 누군가의 댓글처럼, 화려한 한 편의 ‘쇼’로 느껴졌어요. 그리고 그 이질감이 나쁘지 않았습니다.
Dritter Akt : 베버의 곡으로 초연했던 1821년, 200년이 넘는 시간이 흘러 새로운 시선과 다양한 관점으로 2024년의 청중에게 호소하는 오페라. 어쩔 수 없이 저는 신학과 교회의 자리를 떠올렸습니다. 신의 자애로운 얼굴 대신, 악마의 다양한 목소리가 극의 전반을 끌고 갔듯 인간의 눈에는 이미 구닥다리처럼 느껴지는 종교의 그림자. 저는 어디쯤 서 있을까요. 아니, 어디에 서 있어야 할까요. 작년 봄, 한국에서 본 연극 <파우스트(Paust)>가 떠올랐습니다. 주인공인 파우스트보다 훨씬 더 강렬했던 악마 메피스토. 악마의 힘을 빌려 젊은 시절로 돌아간 파우스트의 욕망이 망쳐버린 한 어린 소녀의 삶을 두고, 악마는 인간의 나약함을 비웃습니다. 결국 신에게 자신의 승리를 떠벌리며 그녀가 벌을 받았다고 말하는 메피스토에게, “그녀는 구원받았다”라는 말로 한순간에 상황을 재해석합니다. C.S.루이스의 <스크루 테이프의 편지>나 성경의 욥기처럼, 선악의 선명한 대조는 인생 전반을 돌아보게 하는 문학과 예술의 가장 매력적인 주제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인생의 수많은 장면 속에서 우리는 어떤 역할을 맡을 것인가 일 테지요. 돌아봅니다. 한순간도 구원받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처럼, 파도에 쓸려가는 모래알처럼, 늘 어딘가로 정처 없이 헤매는 마음이었다 해도, 끊어지지 않는 닻처럼 그렇게 다시 돌아오게 만드는 자리가 있었습니다. 두고두고, 돌아볼 장면과 마음들을 바람에 새겨봅니다. 저는 구원받았습니다. 20240810 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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